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쓰카사 가즈코 (문단 편집) == 약혼 == 패전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일본 황실]]과 [[화족]](귀족)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전락([[황적이탈|신적강하]])하여, 황족의 범위가 대폭 줄어들었다. 방계 황족에게 시집가 결혼 후로도 황족 신분을 유지했던 맏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와 달리, 시게코의 여동생들은 황실 밖에서 신랑감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혼하면 황족 신분을 잃게 되었다. (시게코도 패전 후 평민으로 떨어졌다.) 가즈코 공주는 1948년 [[가쿠슈인]] [[여고|여자고등과]]를 졸업한 후 前 시종장 햐쿠타케 사부로(百武三郞)의 거처에서 1년 정도 [[신부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11월 23일 이종사촌 오빠인 오타니 고쇼(大谷光紹)[* [[고준 황후]]의 여동생인 [[오타니 사토코]]의 아들.]와의 약혼이 발표되었다. 오타니 가문에서도 적극 환영했으나 이 약혼은 파혼되었다. 한때 카야 구니나가(賀陽邦寿, 1922~1986)와의 혼담도 있었다. 구니나가는 옛 방계 황족[* 신적강하 이전에는 구니나가 왕(邦寿王)이었다.]으로, 가즈코의 외종조부인 가야노미야 구니노리 왕(賀陽宮邦憲王)의 장손이고, 가즈코의 친할머니인 [[데이메이 황후]]의 친정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条道実) 공작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니나가 본인이 가즈코와의 혼담을 거절하여, 이 역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50년 1월, 가즈코 공주와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의 약혼이 정해졌다. 도시미치는 가즈코 공주보다 6살 연상이며, 7촌 당숙이자 8촌 종조부이다. 다카쓰카사 가문은 [[후지와라]] [[고셋케]] 중 한 가문으로 [[후지와라]] 씨족이기도 하다. 도시미치의 아버지 다카쓰카사 노부스케(鷹司信輔)는 옛 [[공작(작위)|공작]]이자 [[메이지신궁]]의 [[신관]]이었다. 도시미치의 할아버지 다카쓰카사 히로미치(鷹司照通)는 본래 쿠죠 미치타카(九条道孝)[* [[에이쇼 황후]]의 남동생이자 데이메이 황후의 아버지. 즉 에이쇼 황후와 데이메이 황후는 고모-조카 관계이자 시할머니-손자며느리 관계가 된다.] 공작의 이복동생이었지만, 다카쓰카사 가문의 후계자가 요절하자 양자로 들어가 가문을 계승했으며, 1884년에 이루어진 작위 서임 당시 공작위를 받았고, 1947년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었다. 패전 후 처음인 [[공주]]의 결혼에, 신랑감이 옛 공작 가문의 아들이지만 일반 직장인이라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약혼 기간 중에 도시미치는 가즈코 공주가 두 여동생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와 함께 생활하는 구레타케 기숙사를 자주 방문했다. 큰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결혼 전에 신랑 될 사람을 한 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어른들이 정한 상대에게 시집가서 어려움을 겪은 바 있기에, 여동생들은 형식적으로나마 맞선, 교제, 데이트 등을 거친 것이다. 특히 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딸들의 이러한 신식 행보를 적극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시어머니 입장이 될 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가코 황후는 1959년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을 할 때 강하게 반대했고, 그 반대를 이기고 결혼이 이루어진 후에도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시집살이]]를 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